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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조선왕조실록강의

뮬라니 2017. 10. 6. 00:00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강의 포스팅해봐요~!

역사에 도통 관심이 없던 사람도 TV앞에 앉게 하는 설민석 강사의 '조선왕조실록강의'. 역사 문외한인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책을 들게 됐다는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강의'를 정리해 보았어요..!


조선왕조실록(錄) 이란..?

. 승정원(왕의 비서실,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에서 쓴 승정원 일기

. 시정기(춘추관에서 관장하며 당대 업무의 실상과 잘잘못을 적은 기록물. 사초와 각 관청의 기록물 분류 및 정리한 1차적 역사기록물, 사초가 방대하고 속기록이라 알아보기 어려워 정기적으로 편집해 둠)

  * 사초 : 임금이 화내고 눈물 흘린 일까지 기록한 속기록

. 상소문 (선비, 재상까지 왕에게 하는 간언)

이렇게 3가지를 모아 사관들이 종합 편집해서 만든 것이 조선왕조실록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의 분량

조선왕조실록은 2,077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럼 분량이 어느정도 되는 걸까 감이 안 잡히는 데요. 하루에 100쪽씩 읽더라도, 4년 3개월이 걸리고, 책(한권두께 1.7cm)을 일자로 쭉 쌓아 놓으다고 하면 아파트 12층 높이에 이릅니다. 

사료적인 가치

조선왕조실록이 사료적인 가치가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주변 나라들의 기록과 비교해 보면 더욱 알 수 있는데요. 전통깊은 중국의 경우, 남아있는 기록이 단지 200년간의 기록만 있고, 구체적인 묘사 등에 있어 사료적 가치가 떨어집니다. 또한, 일본 역시 단지 20 여년 정도의 기록물만 남아있는데 반해, 조선왕조실록은 500년의 기록이 매우 세부적이고 정확하여 사료적 가치가 뛰어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관의 독립성

후대 왕들은 자신의 선왕을 사관들이 이상하게 기록하진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서 왕조실록을 무척 보고 싶어했는데요. 왕들이 실록을 보는 순간 중립성이 훼손되기 때문에 당대 왕은 실록을 볼 수 없었습니다. 보려는 몇몇 시도가 있었지만 사관들은 목숨 걸고 이를 막았지요. 후대에 계속 보고자 할 경우에는 선왕의 귀감이 될 만한 내용만 몇몇 모아 편찬한 국조보감(세종 때 구상, 세조 때 완성)을 열람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사초에는 임금의 일거수 일투족 뿐 아니라 조선의 사관은 임금을 평가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조 때 사관인 정태제의 사초 일부에 의하면,

'큰 혼란이 진정되지 않았고 막중한 책임이 앞에 있는데 임금은 어찌 경거망동을 하시어 백성들에게 근심을 던져 주십니까 (인조 16년 5월)'

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사관은 단지 기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음을 알 수 있다.

실록과 일기의 차이는 무엇인가?

조선왕들 가운데 쫓겨난 세 왕(연산군, 광해군, 단종(노산군))에 관한 기록은 실록이라 부르지 않고 일기라 합니다. 이후 노산군의 일기는 숙종때 단종대왕실록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역사라는 것은 승자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데요.

유의해야 할 점은 바로 수정실록이라는 것이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있던 선조 때, 광해군을 추대했던 북인이 집권세력이었고 그 때 선조실록을 쓰게 되는데요. 이 후, 인조와 서인이 집권한 후에 북인의 선조실록은 문제가 있다고 하여 선조실록을 수정하게 되는데요. 이것이 바로 선조수정실록입니다.

당연히 집권세력에 따라 실록의 내용이 상이했을 텐데요. 예를 들어, 북인의 선조실록에는 율곡 이이가 서인이므로 이이졸(이이가 죽었다)이라고 간략하게 언급한 반면, 인조 반정 이후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율곡 이이에 대해 3장을 쓰게 됩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선조실록도 폐기하지 않고 보관해 두었는데요, 비록 정치적 가치는 다르지만 후세를 위한 기록으로 보존하고자 하였다는 점입니다.

보관장소(사고 : 史庫)

세종 때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된 위치(조선전기 사고) 는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 4군데였는데요.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본만 빼고 다 불에 타게 됩니다. 그래서 광해군 때 다시 왕조실록을 필사할 때는 사고를 5군데로 늘리고 5편을 똑같이 써서 분산 보관하였는데요, 특히 찾기 어려운 산 속을 보관장소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춘추관(서울), 묘향산(적상산), 태백산, 오대산, 강화도(정족산) 이렇게 5군데에 사고가 위치하였습니다. 이는 광해군의 업적이 됩니다.

현재의 실록 보관처는 3군데인데, 서울대 규장각(오대산, 정족산 사고본), 부산국가기록원(태백산 사고본), 김일성대학교(적상산 사고본)입니다.

춘추관 소장본은 이괄의 난(1624)때 소실되어 오늘날까지 4편이 전해지고 있다.

기록방식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 중 시간의 순서대로 기록된 글을 편년체 기록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실록, -절요, -통감이 이에 해당되지요.

고종실록, 순종실록은 일본인들에 의해 편찬되어 왜곡이 심함. 엄밀히 말해 조선왕조실록이라 보기 어려움.

기타, 사관의 삶

사관은 붓한자루에 목숨을 건 사람들로서, 조선왕조실록을 인류최고의 역사기록으로 만든 장본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들의 소명감을 볼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조선 태종 4년에, 왕이 말에서 활시위를 당기다 말에서 떨어졌는데, 그 경황없는 와중에도,

'이 사실을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

고 명하였습니다. 하지만 태종실록에 의하면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라고 기록함으로서 임금이 금지한 일마저 주저없이 기록했던 그들의 소명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임금이 있는 자리면 어디든 참석했는데요. 벼슬로 보면 정 7품 이하의 낮은 벼슬에 해당하였지만, 자격조건이 매우 엄격하였습니다. 문과 급제자중 성적이 우수한 자, 친가와 처가 4대조까지 흠이 없는 자, 미혼자도 금지(어떤 가문과 맺어질지 모름) 등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해야 하였고, 임금의 권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공정한 역사를 기록한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이 충만했습니다.

사관의 이러한 소신을 보호하기 위해, 임금이라도 사초를 볼 수 없게 하고, 민감한 내용은 임금이 죽은 후에야 제출토록 제도적으로 보장하였지만, 사관의 역사 기록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일례로, 연산군 4년(1498)에 당시 실록 편찬책임자는 훈구파의 이극돈은 김일손의 사초를 검토하던 중에, 김종직의 조의제문(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이 실린 것을 연산군에게 고해 바치는 일이 있었는데요. 김종직과 김일손은 사제관계로 훈구파와 대립하던 사림파였습니다. 선왕에 대한 비판은 민감한 사항이었는데요.

그 결과, '김종직은 선왕을 헐뜯었으니, 대역으로 논단하여 부관 참시하였고, 그 도당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가.. 그 글을 칭찬하되, 사초에 써서 불후의 문자로 남기려고 하였으니, 아울러 능지처사하게 하였노라' 라는 기록처럼 사림파가 대대적으로 제거되는 일이 있었습니다('무오사화', 김일손 등의 신진사림이 훈구파에 의해 정치적으로 화를 당한 사건)

사초가 공개되는 것이 얼마나 큰 비극을 가져오는지, 사관들의 소신과 권력간의 갈등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조선왕조실록에 관해 정리해보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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